* 현행 헌법의 농업 관련 조항들. 성글고 추상적이라 농민 권리를 제대로 담보할 수 없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제기되고 있으며 실제 농업 현장에서 숱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농민헌법’의 제정은 헌법에 발맞춘 연쇄적 법률 정비를 통해 농민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지난달 17일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전곡리 들녘에서 농민들이 트랙터에 연결한 콩 탈곡기로 서리태를 탈곡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연재기획] 헌법 제정 77년, 이제는 농민을 담자
③농민헌법,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2025. 12. 14
농업·농촌의 가치와 농민의 권리에 관한 현행 헌법의 부실한 규정은 농업분야 법률·정책의 소극적 구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헌법에 농민·농업·농촌의 가치를 바로세우는 일은 농민들의 오랜 염원이며, 지역양극화와 식량주권 위기가 가속화하는 현 시점에서 고민해볼 가치가 더욱 높은 주제다. 12.3 비상계엄 내란 사태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으로 개헌 이슈가 재점화된 지금, <한국농정>은 ‘농민헌법’의 필요성 및 이와 관련된 제반 상황을 3부작으로 정리함으로써 다가올 개헌 국면에 농민헌법 의제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연재순서>
①농민헌법의 역사와 현황
②헌법의 사각에 놓인 농민들
③농민헌법, 무엇을 담을 것인가
현행 헌법은 농업과 관련해 경자유전·소작금지 원칙을 제일 먼저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농지임대차·위탁경영의 예외적 허용 단서를 붙여놨고 이것이 오히려 소작과 투기의 면죄부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에 농어업 보호를 위한 지역 개발·육성 책무가 부여돼 있지만 모호하고 추상적인 성격 탓에 되레 반농업적 개발과 지역양극화가 계속되고 있다. 농어민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는 국가의 수급·유통 정책 역시 도시소비자 관점의 가격억제·수입 정책으로 편중돼 왔다. 얼마 안 되는 농업 관련 조항마저 현실에서 왜곡·변질돼 있는 상황. 농민·농업·농촌이 바로서려면 헌법은 무엇을 담아야 할까.
# 농민헌법, 고민은 이미 모여 있다
1987년 마지막 개헌 당시 농민들 또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가톨릭농민회·전국농민협회 등 10개 농민단체가 공동으로 △농민 단체행동권 보장 △지방자치 강화 △농지·토지 공개념 강화 △협동조합 민주화 △농업 독점자본 규제 △농민 정책참여 보장 등을 담은 개헌요구안을 내놓은 것이다. 물론 개헌에 반영되진 못했는데, 사회적 민주의식 성장에 따라 일부는 실현 내지 진전을 이룬 반면 농지 투기, 자본의존 구조 등 핵심적 문제들은 지금까지도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개헌을 재추진한다면 1차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농업 분야의 사각들이다.
문재인정부 개헌 국면에서 30년 만에 본격화했던 ‘농민헌법’ 토론은 더욱 주목할 가치가 있다. 30년간 이어진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고민했을뿐더러 근래의 논의인 만큼 현 상황에서도 시의성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당시 45개 농민·시민단체와 학자들이 결집한 ‘농민헌법운동본부’는 명시적으로 하나의 개헌안을 내놓진 못했지만 제법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냈다.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폐단이 심한 농지 임대차·위탁경영 예외조항에 ‘농민·농촌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범위 내에서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예외성을 확실히 부각하고자 했다. 또한 문재인정부가 발의한 개헌안에도 들어있었듯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그 보전을 위한 국가의 지원 의무를 명시하려 했다.
농산물 가격 억제용으로 변질·오용되고 있는 수급·유통 정책 조항은 ‘생산에서 소비까지’의 공정한 관리와 ‘농가소득 보장’을 강조하는 조항으로 교체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생산비·적정소득’을 보장하자는 주장과 ‘품목별 최저가격’을 보장하자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또 농민 삶의 터전이자 전통·문화의 보고로서 농촌의 가치를 아로새김으로써 농업 파괴, 농민 희생형 난개발을 제재하고자 했다.
특별히 추가하고자 한 건 여성농민 조항이다. 여성농민 지위 향상을 위한 국가의 책무를 명기해 일반적인 여성보다 더 특별한 환경에 놓인 여성농민의 권리를 보호하려 한 것이다. 또한 위 내용들과 별개로 헌법의 서두인 ‘국민의 권리’ 단락에 ‘식량권’을 명시함으로써 식량 문제 전반에 정부의 책임·역할을 강화하고자 했다.
치열했던 고민이 고스란히 좌초된 만큼, 현 시점의 ‘농민헌법’ 논의 역시 이 고민들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최근 농민헌법을 준비 중인 단위로는 문재인정부 당시 농민헌법운동본부의 핵심 주체였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전농을 비롯한 사회 약자들(노동자·농민·청년·여성 등)로 개헌특위를 꾸린 진보당이 독보적이다. 이들은 농민헌법운동본부의 논의 내용을 꼼꼼히 복기하며 그 적합성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다만 종자·농지·농자재·기후·유통·소득·농촌생활 등 이후 10년 동안 변화 또는 심화된 여건을 고려해 고민을 한겹 더 얹으려 하고 있다. 식량주권·식량자급률 중요성 부각, 농촌 거주권 보장, 종자권 보장 등의 의제가 초기 단계에서 개진되고 있으며 이는 이재명정부의 ‘국가책임농정’ 구호와도 연결되는 내용들이다.
농민헌법운동본부 농민헌법연구팀에 참여했던 윤병선 건국대 명예교수 역시 “2017년 당시엔 기후위기가 본격화되기 전이었고 유엔농민권리선언도 채택되기 전이었다. 기후 문제는 물론이고, 유엔농민권리선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규범을 헌법에 추상적 차원에서라도 명시해야 한다. 이를 어떤 문구로 담아낼지는 다시 사회적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고 보완 논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 농민헌법, 농정을 바꿀 수 있다
설령 농민들의 요구가 모두 관철된다 해도 여전히 몇 줄에 불과할 짧은 문구들이지만, 헌법 개정은 당장 농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한민국의 모든 법률·제도·정책은 오직 헌법이 배치해 놓은 주춧돌 위에만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정 전후가 큰 차이 없어 보여도 그 작은 차이들이 농정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헌법의 농지 임대차 조항에 굳이 삽입하는 단서조항 하나가 농지 투기에 눈감아 온 법률·정책에 부담을 지운다. 헌법에 농가소득 보장이 명시되는 순간 농민 희생 일변도의 농산물 수급정책 역시 전기를 맞을 수 있다. 농촌 난개발을 추진해 온 기관·기업·자본세력의 발 앞에 껄끄러운 걸림돌이 생기고, 수십년 동안 한 발을 나아가기 힘들었던 농민·여성농민 권리 보장도 정책의 조력을 받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헌법에 발맞춘 연쇄적 법률 정비도 기대해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수년째 표류하고 있는 「농민기본법」이다. 농민기본법은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의 전부개정안으로, 문재인정부 개헌이 무산된 이후 그 대안으로 등장한 법안이다.
농민기본법은 ‘유령농민’과 ‘가짜농민’을 정리할 ‘농민’ 정의의 재정립에서부터 시작해 유엔농민권리선언의 내용을 담은 광범위한 농민 권리 보장, 식량주권·농지문제·기후위기에 대한 국가책임 강화, 국가균형발전과 남북농업협력 등을 총체적으로 규정한 법안이다.
‘기본법’인 만큼 농민헌법을 구체적으로 풀어 놓은 일종의 지침서 성격을 띤다. 농민헌법은 농민기본법 입법의 강력한 명분이 되고, 입법된 농민기본법은 다시 견고하게 농민헌법을 뒷받침할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농지관리를 강화하고 임차농을 보호할 「농지법」 개정, 농안법의 농산물 가격안정 부분을 농민적 관점에서 재구축할 「식량주권법」 제정 등 농정을 변혁할 법 개정들을 속속 기대할 수 있다.
좌초되긴 했지만 2018년 문재인정부가 제시했던 개헌안의 농업 관련 조항은 ‘농업의 공익성 인정’ 정도에 방점이 찍혔을 뿐, 농업계의 요구엔 크게 미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또다시 개헌 공약을 내건 이재명 대통령은 10년 전보다 확연히 심해진 농업·식량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 데다 마침 ‘농업에 조예가 있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농민헌법 실현에 다시금 희망과 열의가 결집하는 이유다.
※제작지원: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