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경남 함양에서 사과를 재배하는 마용운씨(55)의 과수원. 여름 폭염에 잇따라 가을장마가 내리면서 과수원의 20~30%의 열매가 열과 피해를 봤다. 마용운씨 제공
* 7월18일 충남 당진의 황성열씨(65)의 논. 올 여름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황씨의 논은 침수를 면치 못했다. 황성열씨 제공
* 8월12일 농민들이 한국전력공사와 발전 자회사 5곳을 상대로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후솔루션 제공
* 기후솔루션은 농민 기후소송 ‘국민배심원’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해당 누리집으로 이동할 수 있다. 기후솔루션 제공
국내 온실가스 배출 기업 상대로 첫 손해배상 청구 민사소송 제기
폭염·폭우·한파 등 이상기후 속 사과·쌀·딸기 등 재배하며
생업서 고통받는 농민들 나서
“기후위기 책임 인정하고 피해자 배상방안 마련해야”
농민신문 이유리 기자 2025. 11. 11
“너무 희귀한 일이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어요. 몇 년 전 충남 예산의 과수원들이 사과 중앙이 가로로 쩍 갈라지는 열과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를 봤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올해 우리 과수원이 같은 피해를 입었어요. 수확 직전 뒤통수를 맞은 기분입니다.”
경남 함양에서 15년째 ‘후지’ ‘홍로’ 등 사과를 키우는 마용운씨(55)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과가 빨갛게 익어야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데, 올가을 초입 때 잦은 비와 흐린 날씨로 착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예년보다 늦은 수확에 들어갔지만, 사과 10개 중 2~3개는 가로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으로 과육의 경도가 약해진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가을장마에 빗물을 많이 흡수해 팽창하다 가로로 터지는 열과가 발생한 것이다. 생산량뿐만 아니라 상품성까지 떨어지면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마씨의 설명이다.
마씨가 기후변화로 생업에 위협을 체감한 것은 2018년부터다. 보통 4월말부터 피던 사과꽃의 개화 시기가 4월초로 앞당겨지더니 이후 꽃샘추위와 서리로 꽃봉오리가 얼어붙었다. 그해 마씨는 냉해로 꽃이 피지 않아 큰 손해를 봤다. 그는 “여름엔 탄저병 등 병해충 창궐을 막을 수 없다”며 “농민은 사계절 내내 온몸으로 기후와의 전쟁을 치른 후 이듬해 먹고살 걱정까지 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기후위기가 생존의 위기로 뒤바뀐 것은 베테랑 농부에게도 마찬가지다. 30년 동안 충남 당진에서 벼농사를 짓는 황성열씨(65)는 농업 인생 가운데 최근 몇 년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황씨는 “보통 여름철 태풍을 가장 걱정스러운 날씨로 생각했는데, 최근 3~4년 사이엔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올해만 하더라도 모판 작업부터 꼬였다. 올봄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모가 얼어붙듯 약해졌다. 여름엔 충남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면서 벼가 전부 침수됐다. 논에 들어찬 빗물이 빠지기가 무섭게 찾아온 폭염은 곰팡이병과 벼 깨씨무늬병을 몰고 왔다. 여기에 가을장마가 겹치면서 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피해가 겹쳤다.
“더 큰 피해를 막으려 남들보다 일찍 벼를 베었는데, 그 뒤로 날씨가 너무 화창한 겁니다. 농작업 시기를 고심해도 날씨가 배신하면 한해 농사가 통째로 흔들리는 거죠.”
황씨는 임차농으로 매년 임대료와 비룟값, 인건비가 오르지만 이상기후로 소득은 줄고 있다. 그는 “‘이러려고 30년 넘게 농사를 지었나’ 싶을 때가 많다”면서 “이제는 하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키운 주체에 책임을 물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에 지친 농민이 선택한 것은 이른바 ‘기후소송’이다.
마씨와 황씨를 비롯해 귤·딸기 등을 재배하는 농민 5명은 8월12일 한국전력공사와 발전 자회사 5곳(한국 남동·중부·서부·남부·동서 발전)을 상대로 기후위기로 인한 농업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국내에서 주요 온실가스 배출기업을 상대로 직접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전과 발전 자회사들이 발전량의 96%를 화력발전에서 생산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배출한 온실가스는 국가 총 배출량의 4분의 1에 달한다”며 배상 청구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기후위기를 발생시킨 책임을 인정하고 농민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방안 제시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번 소송에서 농민들은 원고 1인당 500만원의 손해배상금과 2035원의 위자료를 청구했다. 이들은 “한국이 최소한 2035년까지는 탈석탄을 실현해야 한다는 촉구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액수”라고 설명했다.
원고들은 소장을 통해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한전과 발전 자회사 5곳에 있다는 것을 정량화하기도 했다. 소장엔 “한전과 발전자회사들은 2011~2022년 전 세계 온실가스 누적 배출량의 0.4%에 기여한 만큼, 기후변화가 유발한 피해에 대해서 0.4%의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리차드 히디 미국 기후책임연구소(CAI) 공동 창립자의 2014년 논문 ‘화석연료와 시멘트 생산자들의 인위적인 이산화탄소 및 메탄 배출량 추적, 1854~2010년’과 4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된 미국 다트머스대 크리스토퍼 캘러핸 박사와 저스틴 맨킨 교수의 논문 ‘탄소배출 주요 기업들과 기후 책임에 대한 과학적 근거’의 방법론을 활용했다. 실제 비영리 기후단체 기후솔루션이 내놓은 ‘기후 위기, 누가 얼마나 책임져야 하는가 : 한국 10대 배출 기업의 폭염 손실 기여액 분석’에 따르면 국내 업체별 온실가스 배출량 집계가 시작된 2011년부터 2023년까지 한전의 발전 자회사 5곳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5억708만t으로 집계됐다. 이는 10대 다배출 기업 가운데 1위다.
이번 소송을 대리하는 김예니 기후솔루션 변호사는 “농민은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지만, 그 피해 책임은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한 발전 공기업에도 있다”며 “이번 소송이 한전 등 개별 기업의 기후위기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첫 법적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솔루션은 이번 소송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한 ‘국민배심원’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배심원으로서 한전의 탄소감축계획 수립과 이행을 촉구하는 판결문을 작성할 수 있다. 김 변호사는 “캠페인 내용은 향후 재판에서 참고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