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당국이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을 대미 관세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겠다고 공식화하면서 농업계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전문가들도 농업계의 일방적인 희생만으로는 협상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14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농축산물 시장 개방 확대 검토를 시사한 이후 익명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정부가 농축산물 시장 개방 카드를 갖고 미국과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보도가 잇달아 쏟아진다. 일부 매체들은 시장 개방을 기정사실화한 뒤 “이제 대내 조율과 설득에 나서야 한다”며 농업계에 대한 압박을 가속화하고 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 후보자도 1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농축산물 시장 개방이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협상팀도 이를 유념해 관계부처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밝혔지만 실상은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산업부가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거론하며 여론전을 펴는 상황에 핵심 관계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는 당황하는 기색이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통상당국과 시장 개방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며 “주무부처와 구체적인 협의 없이 이같은 중요 사안을 거론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산업부 등에 따르면 미국 측은 그동안 세차례 진행된 기술협의를 통해 ‘국별무역장벽(NTE) 보고서’에 언급된 비관세장벽 개선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3월 발표한 NTE 보고서에서 ▲검역(식물위생) ▲지적재산권 ▲서비스 ▲디지털 무역 등 7개 부문에 걸쳐 모두 22건의 비관세장벽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 중 농업분야 쟁점은 사실상 4건뿐이다. 그런데도 최근의 국내 보도는 정부가 고려하는 협상 아이템으로 쇠고기·쌀·사과 등 농축산물 개방을 집중적으로 다뤄 농업을 ‘내주는 카드’로 굳히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통상당국이 전략적으로 농산물 시장 개방을 선택하려는 배경에 이해 관계 조정이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란 판단이 깔린 것으로 분석했다. 김양희 대구대학교 경제금융통상학과 교수는 “서비스 등 다른 산업은 관련법 개정 등이 걸려 있어 어렵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요 관심사가 한국의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 참여를 포함한 비농업계 의제에 쏠려 있는 만큼 과거와 같이 농업계의 일방적인 희생만으로 한국 정부가 만족할 만한 협상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진교 GSnJ 인스티튜트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을 고려해 한국 농산물 시장에 관심을 갖긴 하겠지만 최종 합의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결국 미국의 핵심 이익이 비농업계에 쏠려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칫 한국 농업을 희생하고도 좋지 않은 협상 결과가 나올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 미국이 협상 타결을 공언한 국가들이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 확대에 동의했다는 점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이미 농축산물 시장을 완전 개방한 반면 해당 국가들은 미체결 국가로 개방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실제 2024년 한국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농축산물 수출액은 85억2000만달러로 영국(21억8000만달러), 베트남(34억4000만달러), 인도네시아(29억1000만달러)보다 2∼4배 많았다.
서 원장은 “한국의 농산물 시장을 개방해 제조업 등 핵심산업을 지킨다는 사고방식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선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미국의 핵심 이익과 연관된 비농업계 규제 완화 등도 전향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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