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식 말고는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물론이고, 적응도 불가능하다.
그 공공성 강화의 실마리를 유통에서 찾고, 이를 통해 생산과 소비를 이에 걸맞게 견인해 내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국농어민신문 전문가칼럼=윤병선 건국대 명예교수 2025. 4. 4
산불 발생 건수가 가장 많다는 4월을 맞이하기 전에 화마가 영남지역을 휩쓸고 갔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아 온 소중한 자산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많은 사람이 기대어 살고 있는 터전마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이번 산불은 확산 속도가 워낙 빨랐고, 이 때문에 피해 규모도 컸다. 이번과 같은 ‘괴물’ 산불이 이렇게 우리 가까이 있 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여름에는 앞으로 우리가 경험할 가장 시원한 여름을 보냈다는 경고와 함께 늦더위는 초가을까지 이어졌고, 이번 겨울 늦은 한파에 쏟아졌던 폭설도 봄 가뭄을 막는 데는 턱도 없었고, 이것이 산의 수목들을 불쏘시개로 만들어 놓았다.
기후변화가 기후재난으로 된 세상에서 농업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농민들은 자연이 농사를 돕는 정교한 과정을 만들어 왔지만, 자연을 지배하려는 자본의 욕망은 그 자리를 공업적 방식의 농업으로 바꿔버렸다. 지구온난화를 가져온 근대 석유문명의 책임에서 농업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되어 버렸고, 결국은 그 피해자가 되었다.
이런 원인은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이 집단의 합리적인 선택을 담보하지 못하는 시장경제의 한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절박함이 있더라도 개별자본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위기를 자초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는 욕심에 기후위기를 더욱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기도 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대응 방식이다. 그렇기에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적 개별적 방식이 아닌 공적 집단적 방식의 전략이 필요하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더욱 적극적인 정책을 펼쳐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의 산업적 농업이 가져온 해악을 몸소 체험한 농민들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악순환을 혼자만의 힘으로 극복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농업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식 말고는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물론이고, 적응도 불가능하다. 그 공공성 강화의 실마리를 유통에서 찾고, 이를 통해 생산과 소비를 이에 걸맞게 견인해 내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생산(판매)과 소비(구매)를 이어주는 유통은 단순히 경제를 연결한다는 소극적 역할을 넘어서서 생산과 소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마침 지난 3월에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이하 aT)는 주요 사업 추진계획을 밝히면서 7대 혁신 방향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고 볼 내용은 그동안 농정 관련 부서에서 기후변화의 대응책으로 흔히 식량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한 비축창고의 확충, 수입선 다변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정책 방향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변화대응부’를 신설하고, 친환경 저탄소 농산물의 생산과 공급 활성화를 위한 기반 확충을 첫 번째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도매시장과 직거래를 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기후위기에 맞서서 친환경 저탄소 농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컸지만, 그것을 가로막은 장애는 생산의 애로와 유통의 장애였다. 따라서 친환경 농산물이 겪고 있는 유통 장애를 aT가 적극적으로 해소하게 된다면 생산의 애로를 해결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라는 근원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한살림을 비롯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유통을 지렛대로 친환경농업의 확대에 기여해 왔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동안 aT가 구축해 온 공공급식 통합플랫폼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학교급식과 공공급식에 친환경 농산물을 확대 공급할 수 있다면 현재 정체되어 있는 친환경농업의 확산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로 인해 급식 식재료의 품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친환경 농산물이 증가하고 있는 점을 참작하여 공공급식 현장에서 이들 식재료를 더 활용할 수 있는 기준을 새롭게 만들어 실현해 낸다면 친환경 생산농가에게 힘을 주는 정책이 될 것이다. 또한 온라인 도매시장을 통해 친환경 농산물의 유통의 변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aT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큰 틀에서 직거래를 활성화하겠다는 방향을 넣은 것도 단순히 유통적 관점을 넘어선 보다 포괄적인 지향성을 갖고 직거래를 고민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다면 aT가 지역 먹거리 선순환 체계의 구축을 지원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성과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전국 150여 기초지자체에서 수립한 푸드플랜이 더욱 진화한다면 농민과 소비자, 시민사회, 지자체 등이 협치를 바탕으로 지역내 경제적 선순환을 넘어서서 생태적 선순환을 구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농업과 먹거리의 공공성 강화가 더욱 절실한 기후재난 시대에 공적 유통의 역할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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