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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11시 가락시장. 진도, 해남에서 올라온 배추 경매가 한창이다. 월동배추 경매 모습.
* 중도매인 이미남 경준농산 대표가 점찍어 놓은 배추 구매 리스트. 중도매인들이 배추 품위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 고행서 배추 경매사가 최신 배추 트렌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경매사가 전화로 산지와 소통하고 있는 모습.
[2025 농산물 유통보고서] ② 가락시장 소프트웨어 (上)
''정보 불평등 해소·여신 기능'' 도매시장 핵심 동력
산지·소비지 정보 유통 허브 농산물 수급조절 역할
대금 정산 등 특수 금융 수행 출하자·중도매인 보호
한국농업신문 박현욱 기자 2025. 4. 1
국내 최대 공영도매시장 가락시장. 이곳은 단순한 농산물 집합소가 아니다. 정보가 흐르고, 돈이 움직이며, 시장이 반응하는 복잡한 유통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오프라인 플랫폼이다. ‘농산물 수집과 분산’으로 역할을 정의하면 반쪽짜리 답변이다. 그 뒤에는 ‘가격 발견’, ‘시그널 전파’, ‘여신’, ‘수급 조절’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이 정교하게 움직인다.
가락시장은 국내 농산물 유통량의 40%에 가까운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걸출한 하드웨어를 보유하고 있지만, 한국농업신문은 그 물리적 구조를 작동하게 하는 ‘소프트웨어’에 주목했다. 출하자·경매사·중도매인 간 정보 공유, 도시와 산지를 잇는 유통 정보, 농민과 유통인을 둘러싼 수익 구조, 신뢰로 유지되는 여신 시스템까지, 본지는 가락시장 유통의 ‘실재’를 기록한다.
# ‘출하자·경매사·중도매인’ 유통 정보 ‘핫라인’ 가동
“이재천(생산자) 파렛트. 퍼거퍼거퍼거...띵동! 네 다음. 두 번째. 퍼거퍼거퍼거... 띵동!”
26일 밤 11시 가락시장 대아청과 배추 경매장. 경매사의 호창(산지·출하자 알림, 응찰 요청)과 추임새가 이어지고 중도매인들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호창과 뜻 모를 추임새는 중도매인들이 응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고 리듬감을 살려 ‘안사면 놓친다’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흔히 쇼핑 매장에서 빠른 리듬의 음악으로 소비 심리를 돋우는 행위와 유사하다.
생산자인 이재천 씨의 저장배추가 경매에 상장됐다. 중도매인들이 품위, 수량, 가격, 소비지 요구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응찰기에 입력, 낙찰받는다. 순식간에 지나간 배추 경매. 1초만에 이뤄지는 것 같지만 여기에 숨어있는 산지와 소비지의 샅바 싸움은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경매 시작 1시간 전부터 경매사와 중도매인이 현장에 출근하는 것이 ‘국룰’. 운동장만한 배추 경매장을 가득 메운 배추 사이로 중도매인과 경매사가 한창 품위와 가격을 저울질 중이다.
419번 중도매인 이미남 경준농산 대표도 밤 9시 출근, 현장에 10시에 도착했다. 이 씨의 손에는 김양옥, 황은숙, 강영철 등 생산자가 적힌 리스트가 들려있다. “이건 오늘 사야 할 배추들입니다.” 생산자 옆에는 3443이라는 숫자가 기입돼 있는데 이는 경매단위다.
3파렛트, 4파렛트, 4파렛트, 3파렛트 순으로 경매한다는 뜻으로 총 14파렛트, 즉 5톤 차량 한 대 분량의 배추 단위다. 1파렛트에 약 71망의 배추가 들어가니 4개의 파렛트를 낙찰받으면 약 284망(71망×4파렛트)을 소비지로 분산할 수 있다.
중도매 경력만 40년. 이 씨의 거래처는 진로, OK마트 등 지역 상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소형 마트와 김치공장, 전통시장 등이다. 거래지역도 전국구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대전, 충주, 원주, 강릉까지 분포돼 있다.
이 대표는 “오늘 284개 2줄 낙찰받았다. 망당 1만600원, 1만3400원이다. 소비지 요구대로 구색을 갖췄다”면서 “경매사에게 수시로 전화해 물량을 파악하고, 현장에서 품위를 확인하고, 거래처에 미리 알려 물량을 조율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고행서 경매사도 밤이슬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경매사는 시장을 읽고 흐름을 조율한다. 수십 통의 전화는 기본. 정보 중계자이자 시장 해석자로 불리는 이유다.
가령, 배추 저장철에 출하 시기를 놓치면 상품성이 떨어지는 탓에 창고 상황부터 소비 흐름까지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요즘 배추 줄기냉병 때문에 줄기세포가 죽는 현상이 있어요. 그걸 미리 산지에 알려야 출하자들의 손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고 경매사는 “오늘 물량이 어떻고 어떤 품종이 잘 나간다 등 유통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산지에 전파한다”며 “가격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출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시장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때문에 안정적 수급을 위해 다양한 수급 정보를 유통한다”고 덧붙였다.
가격 발견, 수급 조절, 상품성 검토, 사전 협의, 정보 공유. 시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위가 양질의 신호로 바뀌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가락시장이라는 시스템을 움직인다.
# ‘농민·법인’ 경제 공동체 수익 구조 ‘한 배’
가락시장 생태계가 40년 가까이 유지된 데는 이처럼 농산물 유통 정보의 ‘핫라인’이 가락시장을 중심으로 구축됐기 때문이다.
변변한 도매시장이 없던 시절 농민들은 정보의 취약계층이었다. 유통 상인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의 종식을 고한 것은 다름 아닌 1985년 가락시장이 건립된 후다.
실시간 경매 시세가 전국에 전파되면서 가락시장은 가격 정보의 불평등을 해소, ‘전국 농산물 거래의 기준가격’ 지위를 얻는 데 성공한다. 대형마트, 전통시장을 가리지 않고 국내 농산물이 있는 어디든 가락시장이 발견한 가격을 참고로 상행위가 이뤄지는 셈이다.
공영도매시장이 유통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는 데 일등공신으로 추앙받지만 도매시장이 번성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수익 구조에 기인한다. 과거 유통상인과 농민을 피아로 구분하면서 치열한 가격 교섭 경쟁을 벌여 왔다면 경매제도가 생겨나면서 도매시장법인이라는 대리인을 농민, 즉 출하자 편에 세운 것이다.
업계에서는 흔히 농민과 도매법인을 한 배에 태웠다고 표현한다. 낙찰금액의 일정비율, 즉 수수료가 도매법인 수익원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수수료율이 6%라 가정, 농민이 가락시장에 출하해 100만원에 낙찰받으면 이중 6만원은 도매법인 수익이 된다. 농민 수취가격이 높으면 도매법인 이익도 덩달아 높아지도록 설계한 셈이다.
이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데 과거 유통 상인이 독점했던 정보를 도매법인과 농민이 공유하면서 보다 나은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로 활용되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정보에 취약한 농민들을 대신해 중도매인과의 거래 교섭에서 대등한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과거처럼 칼질당하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거칠게 표현해 농민과 도매법인의 경제 공동체라는 개념이 각 주체의 이익을 확보하면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영도매시장을 유지하는 틀을 구축해 왔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하는 가락시장 독점 문제, 이익을 독식한다는 문제제기가 맞다고 가정하면 되려 출하자들이 가락시장을 찾는 아이러니를 설명할 길이 없다.
# 공영도매시장 소프트웨어 ‘여신’ 핵심 요소
출하자와 중도매인들이 가락시장을 이용하면서 가장 신뢰하는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여신’ 기능이다. 실제 가락시장 운영의 소프트웨어 중 가장 강력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최근 유통 및 플랫폼 업계에서 벌어진 티몬, 발란 등 기업들의 위기는 재무건전성의 중요성을 재확인시켰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었고, 협력사와의 신뢰가 무너지며 결국 기업 존속 자체가 흔들렸다.
가락시장 도매시장법인 관계자는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중개하는 조직이 아니라, 출하자에게 대금을 안정적으로 지급하는 일종의 ‘여신기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가락시장에서는 경매가 끝난 당일이나 다음 날에 출하자가 대금을 받는다. 반면 중도매인으로부터 법인이 실제로 돈을 받는 데는 열흘에서 보름이 걸린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도매법인은 자체 자금으로 대금을 선지급한다. 이는 도매시장만의 특수한 금융 기능이다.
이 같은 구조가 유지되려면 도매법인의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과 이익잉여금, 즉 재무적 안정성이 필수다. 한 법인 관계자는 “명절 하루에만 80억 원씩 결제해야 할 때가 있다”며 “수수료가 5% 이하로 제한되면 단기 순이익이 급감하고, 이는 자금 운용력과 출하자에 대한 지급 안정성을 떨어뜨린다”고 설명했다.
실제 가락시장 법인들은 성수기나 명절이면 담보금 대비 300%에 달하는 미수금 리스크를 감내한다. 예컨대 담보금 200억원에 800억원의 대금 결제가 이뤄지는 사례도 있다. 이는 도매법인이 스스로 부도 리스크를 떠안고서라도 출하자의 수취 안정성을 지키고 있음을 방증한다.
일본은 2000년대 초부터 도매시장 수수료를 자율화해 재무건전성과 시장기능 활성화를 동시에 추구해왔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일정 금액과 일정 비율을 병행한 수수료 체계를 유지하며 법정 상한선(7%)까지 규제하고 있다. 이는 도매법인의 수익 구조를 경직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농산물 유통 전문가는 “도매법인의 역할을 단순 중개업으로 축소하면 시장 전체가 흔들린다”며 “안정적인 유통을 위해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 출하자 보호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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